정현영의 벌어야 사는 사람들②-1

"평범하게 살기 싫어서 돈이다"…10년 만에 '취준생' 된 30대 애널리스트

입력 2015-09-07 14:04:58 | 수정 2015-09-07 15:48:20
그들은 돈을 벌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그래야 했다. '돈(money)보다 꿈(dream)이 먼저'라고 외치던 젊은 시절의 노래는 다시 들을 수 없다. 벌어야 사는 시대는 바빠야 정상이다. '안녕?'이 아니라 '바쁘지?'로 안부를 묻는다. 시인들은 가난이 슬픔이고 슬픔을 고통으로 느낀다고 한탄한다.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의 복판에 서서 물어봤다. 당신한테 돈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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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키가 크지도 않고 외모도 평범했다. 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공무원이 되어야 안정적인 인생을 보낼 수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평범하게 살기 싫었다. 어린놈의 객기로 여기는 시선도 많았지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나의 20대 인생 목표는 '돈을 벌자'였다."

2005년 2월, 대학을 나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10년 이상 치열하게 살아온 30대 증권사 애널리스트(기업분석가) 정우준(39·가명)씨는 얼마 전 직장에 사표를 냈다. 하루 17시간 이상 살인적인 업무 강도를 참아내도 샐러리맨(봉급생활자)이란 '명찰'을 달고서는 결코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다.

'큰 돈'은 정씨에게 액수와 비교 가능한 규모가 아니라 잉여(쓰고 난 나머지)의 개념이다. 생활비를 제외하고 난 '나머지 돈'이 자신에게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선물해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대한민국 자본시장에서 엿본 샐러리맨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다며 웃어보였다.

1997년 대학 입학 이후 '돈 고민'에 빠진 정씨는 회계사 자격시험부터 준비했다. 돈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돈을 만지는 직업을 찾아 나열하는 것이 습관일 정도다.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업계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1~2학년에 이미 공인회계사 자격시험 1차에 합격한 그는 2차 시험에 응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대한 돈을 굴리는 펀드매니저란 직업을 찾아냈다. 매니저란 직업을 가지면 돈 버는 기술과 돈에 대한 태도·철학 등을 단번에 배울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그 당시 내가 본 펀드매니저가 있는 곳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과 같았다. 다만 매니저로 성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부족했다. 2003~2004년에만 해도 간접투자(펀드 등) 문화보다 직접투자가 대부분이던 시기였고 요즘처럼 자산운용사와 자문사의 구분도 거의 없었다. 증권사에 입사하면 사내에서 선발돼 매니저로 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증권사에 입사하게 된 이유다."

당연히 집안의 반대는 상당했다. 신한은행과 KB은행에 모두 합격했지만 L증권사에 입사하기로 한 정씨. 그는 첫 출근에 앞서 부자(父子)간 각서를 써야했다. '선물·옵션 등 투기성 투자는 배우지도 하지도 않겠다', '가족의 돈을 절대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솔직히 말해서 금융업계에 입사하면 소위 '가족 돈'을 끌어오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신입사원은 은행, 카드, 주식, 펀드 등 영업해서 터야 할 계좌 수가 적어도 20~30개는 된다. 나홀로 영업해서 계좌를 뚫어나갔다."

L증권사에 상위권으로 입사한 정씨는 애초 본사 IB(투자은행)부서로 배치됐다. 하지만 곧바로 인사팀장을 찾아갔다. 영업점 발령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펀드매니저란 일생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 10년 전에 IB는 만기 10년짜리 등 장기 투자 수단인 채권매매가 주업무였다.

"인사팀장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모두가 본사로 배치받고 싶어하는데 영업점으로 무턱대고 보내달라는 신입사원은 처음봤기 때문이다. 영업점에서 막내 생활을 시작했는데 너무 편했다. 물통도 안 갈았다. 닷컴버블이 꺼지고 수 년간 증시가 급락을 거듭하면서 '패배 주의'가 가득해서였다. 선배들은 빨리 나가서 다시 은행쪽으로 가라고 조언했을 정도다."

'위기는 기회'였다. 패배 주의에 빠진 곳에서 아무도 신입사원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씨는 선배들이 맡아 해오던 발로 뛰는 기업탐방을 쉴 새 없이 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보고 들은 내용을 밤잠 설치며 애널리스트처럼 분석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하는 날들이 쌓여갔다. 영업점 사원에서 본사 리서치센터 투자전략부서로 자리를 옮기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6개월이었다.

"드디어 돈 버는 곳에 왔다. 날마다 연예인들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TV, 신문에서만 보던 유명한 주신운용본부장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베스트 애널리스트와 함께 식사를 했다. '와! 이 사람이 내 눈앞에 있다'며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던 기억이다. 그랬는데 그들이 '돈 벌려면 사업을 해야지 왜 여의도에 왔느냐'고 나에게 반문해 왔다.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여의도에 와서 평범한 인생을 바꿔보려고, 샐러리맨 신화를 꿈꾸면서 밤낮 없이 뛰었지만 그는 좌절해야 했다. 유명한 애널리스트가 되면 수 억원에 달하는 고액연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자본시장은 미국과 달랐다. 봉급쟁이는 봉급쟁이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여의도에서 샐러리맨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안 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인데 그 이유는 국내 자본시장의 태생이 제조업이라서다. 금융계열사 몇 곳을 제외하면 증권사 모(母)회사가 전부 제조업이다. 오너가 사람을 비용으로 여긴다. 제조업 기반 입장에서 볼 때 연구·개발(R&D)쪽인 리서치센터의 경우 일종의 '비용'인 셈이다. 연봉에 불만을 가진 애널리스트가 나가면 그 가격(연봉)에 맞춰 데려오면 그만이란 식이다."

그가 판단한 여의도 자본시장의 핵심은 영업부서. 제조업 기반의 오너가 인정하고 고액연봉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영업부서란 얘기다. 또 기업의 DNA와 금융 DNA는 분명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선진 금융권에선 단 한 명의 직원이 100억원을 벌어다 줄 수도 있고 반대로 막대한 손해를 낼 수 있다는 개념이 통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심정이라면서 정씨는 여의도 자본시장의 구조적인 문제를 꼬집었다.

"국내 자본시장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서 중국으로 가고 싶다. 기회의 땅에서 가족과 함께 더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꼼꼼하게 준비 중이다. 아이들은 이미 중국어를 공부한지 오래다. 중국은 지금 나에게 '20대의 여의도'와 같다. 중국 상장기업 리서치 보고서도 많이 써왔고 인적 네트워크를 모두 동원해 현지 법인장(증권사 등)을 찾아가 객관적인 자료도 모으고 있다. 다시 10년을 일해보면 지금보다 더 평범하지 않은 인생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자본시장 한 가운데서 상장기업 분석보고서를 10년째 써온 30대 후반의 이 전직 애널리스트는 '취업준비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두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중국으로 인생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정씨. 그는 이미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②-2 '돈 없이도 행복하다는 말은 거짓이다'에서 [인터뷰] 계속 >

☞ [정현영의 벌어야 사는 사람들②-2] "돈 없이도 행복하다는 말은 거짓이다"

정현영 한경닷컴 기자 j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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